우리가 흔히 축구의 시초를 뽑자면, 근대 축구로써의 시초는 공식적인 축구 규정을 만들어 럭비와 분리시킨 잉글랜드를 뽑지만, 순수하게 공차기라는 놀이를 뽑자면 중국을 뽑는 경우도 있고 고대 로마를 뽑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스갯소리로 종종 언급되는 것이 바로 고대 바이킹이죠.
온 동네를 약탈하고 보이는 남자는 죄다 죽이다가 어쩌다 남아도는 모가지 가지고 발로 툭툭 차면서 놀았대나 뭐래나... 하면서 축구가 생겼다고도 말하는데, 실제로 중세의 축구는 공 대신 사람을 발로 차는 종목이였으니 나름 일리있는 주장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바이킹들은 본래 부족사회였습니다. 간섭따위 거르고 자기네 방식대로 노는 걸 선호했죠. 하지만 중세 유럽은 그들을 가만히 냅두지 않았습니다. 가장 센 귀족을 중심으로 뭉치는 봉건제도 하에서 부족사회도 조금씩 변화해야만 했죠.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 같은 사가 속 인물들이 그 부족들을 끌어모아 왕국을 만들었고,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미발왕 하랄이라 불리우는 하랄 1세가 그렇게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뭐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칼럼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은 모름지기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죠. 부족끼리 자유롭게 살았던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체념하고 중세 봉건제에 적응해 나갔지만, 몇 반골들은 잉골프 아르나르손을 따라 자유롭게 살 자신들의 땅을 찾아 떠났고, 그들은 기어히 브리튼 섬에서 한참 윗쪽에 떨어진 망망대해에 위치한 화산섬을 발견했습니다. 그 섬이 바로 오늘 이 칼럼의 주인공인 아이슬란드고요.
첫 리그는 고작 세팀만 참여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이슬란드 최초의 축구팀 KR과, 프람. 그리고 ÍBV만이 참가했죠. 그나마도 ÍBV는 연고지가 레이캬비크가 아닌 베스트만내야라고 불리는 남쪽의 조그마한 섬에 위치해 있었기에, 결국 딱 한경기만 치루고 기권을 하고 맙니다. 그렇게 딱 2경기만 벌어진 첫 리그는 KR이 1승 1무라는 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무렵,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대다수의 유럽 국가는 그나마 진행되던 리그도 중단하고 모든 국가의 역량을 전쟁 수행에 집중하는 총력전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는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전쟁같은거 끼지도 않는 평화로운 덴마크와 같은 왕을 섬기고 사는데 무슨 전쟁인가요? 계속 공이나 차면 그만이죠.
그렇게 아이슬란드 축구는 남쪽의 대륙이 독가스와 참호족으로 찌들어 갈 동안 유유히 발전했습니다. 리그에 참여하는 팀이 한 팀이나 더 늘어난 것이죠. 하지만 이 이후 아이슬란드 축구는 정체에 빠졌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인구가 10만명도 채 안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축구팀이 늘어나겠어요? 이 정체는 히틀러가 아이슬란드를 공화국으로 만들어주고도 10여년이 지난 5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전국리그로 확장하자니 교통수단도 별로 발전하지 않았고, 수도 근처에서만 리그를 치루자니 인구는 10만명도 채 안되는 나라고.
그래도 이 시기엔 처음으로 아이슬란드 축구 대표팀이 꾸려져 친선 경기를 치뤘습니다. 이 당시 아이슬란드는 피파에 가입 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상대였기에, 상대는 똑같이 덴마크의 속령이였던 페로 제도였고, 원정에서 0:1로 이기면서 국제 축구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첫 정식 친선 경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피파에 가입하기 직전에 덴마크와 상대해 0:3으로 완패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아이슬란드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가 이루어집니다. 바로 승강제의 시작이었죠. 195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엔 FA컵인 아이슬란드 컵이 생겨났고, 리그 우승팀은 유러피언 컵에 진출하게 됩니다. 드디어 아이슬란드가 최신 트렌드를 접할 기회를 만난 것이죠.
하지만 그 뒤로도 아이슬란드의 축구는 영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비해 축구력은 그만큼 늘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잔디가 죄다 겨울만 되면 죽어버려서 볼 찰 수 있는 시기가 여름뿐인걸...
아이슬란드 축구는 결국 내적 성장은 계속 이어가도 끝을 모르고 발전하는 대륙축구와의 차이를 실감합니다. 1967년, 덴마크에게 14:2로 탈탈 털리면서 말이죠. 그리고 이 경기의 소식을 들은 작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로마에게 전쟁에서 진 것에 대해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한니발처럼 그도 그랬을진 모르겠으나,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죠. 바로 아르노르 구드욘센입니다.
아이슬란드 선수 최초로 유럽 본토 프로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었고, 안더레흐트와 지롱댕 드 브로도 등 명문구단을 거친 최고의 선수였죠. 이 선수가 등장한 이후 덴마크한테 14:2로 털리던 아이슬란드는 친선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1:!로 비기고, 월드컵 예선에서 소련을 상대로 1:1로 비길 정도로 일취월장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리히텐슈타인같은 나라가 그래도 알바니아 수준으로 올라갔다.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가 17살에 가진 아들은 그보다도 더 대단한 선수로 성장했죠.
바로 아이슬란드 최고의 선수로 뽑히는 아이두르 구드욘센입니다. 첼시, 바르셀로나 등등 내노라하는 최고의 클럽에서 뛰고 빅 이어까지 들어올린, 어쩌면 대다수의 축구팬들이 길피 시구르손 이전 유일하게 알던 아이슬란드 선수가 아닐까 싶던 분 말입니다. 그리고 알 사람은 다 알지만 이 부자는 축구 역사상 최초로 국가대표 경기에서 부자 동시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기도 했죠.
그리고 구드욘센 부자가 한 필드에서 나란히 뛴 90년대를 기점으로 아이슬란드 축구에 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사상 최초로 UEFA 주관 대회였던 U-18 선수권 대회를 유치한 것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질서를 모두 무너트릴 엄청난 변화, 이젠 겨울에도 축구를 할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바로 미국에서 한참 유행하던 인조잔디를 들여오는 것에 있었습니다.